이십여 년 전에는 광주에 상무대가 있었다. 병아리 이등병들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시키는 곳인데 나도 두어 달 그곳을 거쳐 밤 기차를 타고 전방으로 가게 되었다.
기차가 한 시간 반쯤 달리면 여자 친구가 사는 아파트를 지나가게 된다. 나는 새벽 일찍 전화를 걸어 여자 친구에게 부탁했다. 새벽 열차가 지나갈 때 창가에 서 있어 달라고. 멀리서라도 보고 싶다고.
용산을 향해 자정쯤 출발하는 기차 안에는 이등병들의 흥분과 떨림이 가득했다. 이등병들은 기찻길 옆, 누군가의 방을 밝히고 있는 따뜻한 불빛을 바라보다가 하나둘 잠이 들었다.
나는 잘 수 없었다. 여자 친구가 사는 도시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옆자리에 있던 동기가 기지개를 켜며 내게 왜 자지 않는지 물었다.
내 대답은 동기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 여자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소식이 앞자리, 뒷자리로 퍼지자 수많은 이등병들이 눈을 비비며 싹튼 콩나물처럼 잠에서 깨어났다.
역에서 멈췄던 기차가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그 아파트가 가까워졌다. 기찻길 옆 아파트, 불 켜진 새벽 창가에 서 있는 여자를 찾으면 된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오른쪽 창으로 몰렸다. 점점 가까워진다. 저 아파트다. 103동이 보인다. 육 층, 불 켜진 창이다!
그 순간 하행선 화물 열차가 우리 기차를 지나가며 차창을 가렸다. 이등병들의 한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길기도 길었던 화물 열차가 지나가자 우리 기차는 이미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깬 듯, 조는 듯 창 밖을 바라보다가 한강 철교를 건넜다. 제대할 때까지 복무할 부대를 찾아갔고 얼마 뒤 여자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보았느냐고.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울고 싶었지만 애써 웃었노라고. 어느 기차인지 몰라 동이 틀 때까지 서 있었노라고.
나는 답장에 거짓말을 썼다.

김남중 님 | 동화 작가

김남중 님은 2004년 《기찻길 옆 동네》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자존심》으로 2006년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나는 바람이다1.2》, 《불량한 자전거 여행》, 《새나라의 어린이》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42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