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제주도의 바닷가 길을 걷는 사람도 있고 남해안 섬마을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홀로 호젓이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안녕하세요,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혹 그가 웃으며 대답을 해 오면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는 느낌이 든다. 꽃향기가 참 좋군요. 난 두 번째 말을 건넨다. 또 봐요. 그이가 손을 흔들며 지나친다. 사실 난 세 번째 말도 준비해 놓았다.
봄날의 길은 세상의 어떤 시보다 아름다워요.
물론 이 말은 준비만 했을 뿐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다. 아카시아 꽃망울이 툭툭 터지기 시작하고 찔레꽃 향기가 황토 흙냄새와 함께 스며드는 호젓한 길 위에서 누군가에게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것이 환상이라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망설여진다. 마음의 순도가 어두워진 탓이다. 그래도 언젠가 먼 길을 걷다가 꼭 말이 통할 것 같은 이가 있다면 해 보고 싶다. 봄날의 길이 시보다 아름다워요. 혹 그이도 좋아하지 않을까. 문득 그가 아끼던 시 한 줄을 건네주지 않을까.
길을 걷는 사람 중에 하급의 걷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리는 무슨무슨 길이라 이름 붙여진 길을 걷는 것이 그것이다. 같은 형식의 아웃도어를 입고 같은 형식의 트레킹화를 신고 같은 형식의 모자를 쓰고 걷는 모습은 부자연스럽다.
비싼 돈을 들여 먼 이국의 무슨 순례길이니 하는 데를 걷는 것도 내겐 이상하다. 자신의 조국, 자신의 고향 땅 길은 걷지 않고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의 길을 걷고 도장을 받아 와 자랑하는 모습은 걷기의 최하등급이다.
걷기의 최상 등급이 있다. 봄 길을 걸어 고향 집까지 가 보는 것이다. 닷새쯤, 혹은 열흘쯤 걸어 고향집에 이를 수 있다면 생은 그에게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줄 것이다.

곽재구 님 | 시인

곽재구 님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순천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시를 강의합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사평역에서》, 《와온 바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 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85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