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의 누부라벨리를 여행할 때의 일이다.
한 사내가 3보 1배로 설산에서 흘러내린 계곡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 환하게 웃는다. 볕에 그을린 얼굴에서 쏟아지는 웃음이 샘물 같았다.
어디로 가는가?
놀랍게도 그의 대답은 고향 집이었다. 티베트 불교의 성지 라싸나 신들의 거처 카일라스가 아닌 그의 대답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고향 집은 한 인간이 태어난 곳이다. 어머님이 있고 자장가가 있고 살붙이 형제와 동무들이 있는 곳이다. 채송화 꽃밭 곁에서 해 질 녘 아버지가 하모니카를 불던 곳이다. 사랑과 꿈, 고통과 그리움, 삶의 시원이 비롯된 곳이다. 신도 종교도 예술도 철학도 고향 집이 있는 다음에야 가능하다. 아름다운 길의 끝에 고향 집이 있을 거라는 내 생각은 이 라다키 사내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월호가 물에 잠긴 지 1년 지났다.
단원고 2학년 이승현 군은 그때 고향 집을 잃었다. 자장가도 채송화 꽃밭도 하모니카 소리도 잃었다. 대신 아버지와 누나가 3보 1배로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팽목항을 출발한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의 광화문 광장이다. 520km를 비와 눈과 바람 속에 자벌레의 몸짓으로 나아간다. 그들이 도달할 곳이 고향 집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1년 전 부녀는 자신들이 오체투지로 진도의 어느 작은 포구 마을에서 서울까지 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 앞에 중립 없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들을 추모하며 남긴 말이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 마음의 3보 1배를 하자.

곽재구 님 | 시인

곽재구 님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순천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시를 강의합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사평역에서》, 《와온 바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 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86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