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한 중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다.
학교는 호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산벚꽃들이 연분홍색의 얼굴을 호수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 호숫가의 농로를 지나가는 경운기 소리도 분홍색으로 느껴졌다. 교실에서도 산벚꽃 나무들의 얼굴이 환히 보였다. 시골 중학교 1학년 아이들 얼굴빛은 봄 산보다 환하다. 청중의 수는 스무 명 남짓, 전교생이 모인 것이라 한다. 아이들과 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지닌 가장 따뜻한 마음을 모아 눈앞의 풍경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시란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 주지 않은 것들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는 것이지 창밖에 산벚꽃 나무 보이지? 한번 인사를 해 볼련?
아이들이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 아침 먹었니? 난 영화관에 가 본 적 없는데 넌 가 봤어? 여행 좋아해? KTX 타 보았어? 요즘 할머니가 아프셔. 내가 밥을 해 드렸는데 조금 드셨어. 수학 공부가 싫어.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새 축구공이 하나 있었으면. 나는 밥보다 라면이 좋아…….
아이들이 산벚꽃 나무에게 차례로 얘기하는 것을 들으며 내 마음 안에도 분홍 꽃이 피었다.
마음을 모아 한 사물에게 인사를 했을 때 그 사물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지. 중얼중얼 말을 걸어오기도 한단다. 그걸 대상과의 교감이라고 해. 교감이 잘 이루어진 시는 따뜻하고 신비하단다. 교감이 이루어진 세계에서 마음을 모아 상대방을 따뜻이 응시할 때, 그 순간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단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하는 사랑은 사랑의 극히 작은 일부분이지. 그러니 눈앞의 모든 풍경들과 인사를 잘하렴. 세상이 사랑스러워질 수 있단다.

그때 한 아이가 물었다.
사람이 미울 땐 어떻게 인사를 하나요?
이 질문이 나를 당황하게 했다. 머릿속으로 미운 사람들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갔다. 이렇게나 많은 미운 사람이 내 마음 안에 있다니……. 결국 아이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 매다가 돌아왔다. 아 미운 사람들에게 어떻게 마음의 인사를 하지? 국밥 한 숟갈을 먹다가도, 중간고사 리포트를 읽을 때도, 세월호 유족들에게 뿌려지는 물대포를 TV 뉴스로 바라보면서도 내 머릿속은 여전히 맴맴거린다. 당신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겠는가?

곽재구 님 | 시인

곽재구 님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순천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시를 강의합니다. 지은 책으로 시집 《사평역에서》, 《와온 바다》,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 기행》, 《우리가 사랑한 1초들》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88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