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범선을 타고 나가사키에 다녀왔다. 돛을 펴 항해하는 범선의 선원은 이런저런 할 일이 많았다.
가장 긴장되고 재미있는 건 역시 배를 조종할 때였다. 나침반과 내비게이션이 방향을 알려 주지만 물결과 바람이 끊임없이 부딪치기 때문에 수십 미터나 되는 배의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늘 긴장을 해야 했다.
밤에는 당직 두 사람이 배를 책임졌다. 오월에 겨울옷을 입고 찬바람을 맞으며 캄캄한 밤바다 가운데서 배를 몰 때면 두 시간짜리 근무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나가사키에서 일정을 마치고 거제도의 지세포를 향해 출항했다. 일본 근해에서도 파도가 제법 있었는데 대한 해협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니 배의 흔들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야간 근무의 가장 좋은 근무 시간은 초저녁과 새벽이다. 주간 마지막 근무에 운 좋게 야간 첫 근무를 맡은 나는 네 시간 동안 배를 몰고 열한 시쯤 다음 사람에게 조타륜을 넘겨주었다.
그날 밤 대한해협의 파도는 정말 고약했다. 뱃머리가 들렸다가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꼭 롤러코스터 같았다. 잠들었다 깜짝 놀라 깨기를 반복하다 어느새 깊은 잠이 들어 버렸다.
아침이 되자 파도가 잔잔해졌다. 밖으로 나온 나는 깜짝 놀랐다. 나와 교대했던 분이 그대로 배를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근무자가 나오지 않아 그분이 밤새 배를 지켰던 것이다.
다음 사람에게 화가 났지만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밖에 있는 사람이 고생하는 걸 알면서도 차 한 잔 가져다주지 않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끄러움 뒤에 찾아온 건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다시 바다를 건너게 된다면 그분과 함께 배를 타고 싶다. 혼자 밤새 파도와 싸우고도 씩 웃으며 선실로 사라진 그분이라면 목숨을 건 모험이라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배를 타 보면 사람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남중 님 | 동화 작가

김남중 님은 2004년 《기찻길 옆 동네》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자존심》으로 2006년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나는 바람이다1.2》, 《불량한 자전거 여행》, 《새나라의 어린이》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http://www.positive.co.kr/good/71347_48_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