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무했던 부대에 제대하고도 두어 번 면회를 갔다. 남쪽에서 최전방까지 먼 길이었는데 나름 필사적이었던 이유가 있다.
여자 친구는 훈련병이었던 내게 정성 들여 편지를 보냈다. 기갑 학교까지 서너 달 훈련을 마치고 전방의 전차 부대에 배치될 무렵에는 편지가 수십 통이 되었다.
국문과 전공인 여자 친구의 편지는 마법처럼 나를 웃고 울게 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편지만큼 사랑도 깊어갔는데 불현듯 보안 검열이 나온다는 예고가 왔다. 그동안 모은 편지를 모두 소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편지들을 결코 태울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어둑할 무렵 부대 뒷산에 올라갔다. 비에 젖지 않도록 편지 뭉치에 꽁꽁 비닐로 몇 겹 방수 처리를 해서 돌 더미 속에 묻었다. 검열이 끝나면 찾아갈 수 있게 표지도 세웠다.
얼마 뒤에 다시 편지를 찾으러 갔다가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돌밭은 넓고도 넓어서 표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제대할 때까지 시간 날 때마다 돌밭을 헤맸다. 편지가 어딘가에서 나를 부르며 울고 있을 것 같았다.
제대한 뒤에 용돈을 모아 순대와 치킨과 수박을 사 가지고 면회를 갔다. 후임들이 맛있게 먹는 동안 다시 돌밭을 헤맸어도 편지는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새로운 편지들이 계속 이어져 전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가끔 지난 시절을 생각하면 그 편지들이 문득 떠오른다. 예전에는 내가 찾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도 찾지 못할 거라고 안심을 했다. 나이를 먹으니 너무 오랜 세월이 가기 전에 누군가 발견해 줬으면 싶기도 하다.
그 사람이 이등병이었으면 좋겠다. 스물세 살, 착하고 예쁜 여학생이 정성 들여 쓴 편지를 읽고 웃어 주었으면, 그렇게 사랑받은 나를 부러워했으면, 만날 수 없는 자기 사랑 생각에 눈도 뜨거워졌으면, 그러다가 담배 한 모금에 힘을 부쩍 냈으면 좋겠다.
이십 년 넘게 숨어 있는, 여전히 살아 있을 편지가 두 번 좋은 일을 하게 말이다.

김남중 님 | 동화 작가

김남중 님은 2004년 《기찻길 옆 동네》로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을, 《자존심》으로 2006년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습니다. 지은 책으로 《나는 바람이다1.2》, 《불량한 자전거 여행》, 《새나라의 어린이》 등이 있습니다.

출처 좋은생각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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